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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는 삶 (속사람)
거울 앞에 섰다가 문득 멈춘 적 있으십니까? 저는 얼마 전 아내 얼굴에 생긴 주름을 보다가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늙었구나.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말씀, 그게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원리라는 걸 살면서 점점 실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그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았을까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극한의 고난 속에서 쓴 편지입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리며 오해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긴 말이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좀 의아했습니다. 저 정도 고생이면 낙심할 법도 한데, 어떻게 저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새 언약의 직분이었고, 둘째는 부활 소망이었으며, 셋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섬겨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서 그는 현실의 고통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다 보면 종말론적 소망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여기서 종말론적 소망이란 단순히 세상 끝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미래를 현재의 근거로 삼는 태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를 이미 확정된 사실로 믿고 지금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현재의 고난이 견딜만하고 별것 아닌 것 같이 고백하는 건 이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출처: 고린도후서 4장, YouVersion 성경).
제또한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순간순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참을 수 있었던 건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낼 미래가 꿈꾸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똑같지 않을까요? 바울의 맥락과 다르지만, 그 구조는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바울이 낙심하지 않은 이유 ① 새 언약의 직분을 받은 은혜
- 바울이 낙심하지 않은 이유 ②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할 소망
- 바울이 낙심하지 않은 이유 ③ 성도의 영혼을 섬겨야 할 사명
겉사람은 낡아지고, 속사람은 깊어진다
본문에서 바울이 쓴 단어 두 개가 대조를 이룹니다. 겉사람(outer man)과 속사람(inner man)입니다. 겉사람이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해 갈 수밖에 없는 육체적·세속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반면 속사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한 영적 실존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생이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출처: hangl.net 성경 주석).
저는 아내와 이십여 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아내는 우리 부부 사이를 "전우"라고 표현합니다. 낭만적이지 않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그 표현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 둘을 키우며 다투고 화해하고 또 다투고, 그렇게 쌓인 시간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겉모습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아내 얼굴의 주름, 제 머리에 늘어난 흰 머리카락.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로를 이해하는 폭은 훨씬 넓어졌습니다.
저의 일상인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오래 알아갈수록 제가 먼저 겸손해지고, 내 가족만큼 남의 가족 사정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속사람의 성장이란 거창한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쉽게 말해, 더 많이 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 겉사람이 세월과 함께 낡아갈수록 속사람의 깊이는 더해지며, 이 새로워짐은 미래의 약속이 지금 현재 작동하는 방식으로 이미 우리 삶 안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으면 지금이 달라진다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스코페오(σκοπέω)입니다. 스코페오란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소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는 건 현실 도피가 아니라, 무엇을 삶의 기준점으로 삼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도 한동안 통장 잔고, 직장의 안정성, 아이들 성적 같은 것들을 기준 삼아 살았습니다. 그것들이 흔들리면 저도 흔들렸습니다. 그게 보이는 것에 시선을 고정했을 때의 결과였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바울도 육체적 고난이 실제로 고통이었다는 걸 인정했습니다. 다만 거기에 궁극적 가치를 두지 않았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저와 아내의 유전자를 반씩 받았지만, 저희가 살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저희 세대가 이루지 못한 것을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발전시킬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더 좋은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기대, 그게 제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구체적인 모습 중 하나입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믿음, 그것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붙잡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원론적 세계관, 즉 영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무가치하다는 식의 구분과는 다릅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되, 그 궁극적 의미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게 실제로 어떤 느낌인가요?
A. 제 경우엔 거창한 체험보다는 조용한 변화였습니다.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혼자 감당하려 했던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앙의 성숙은 환경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환경이 그대로여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Q. 보이는 것에 집중하면 안 되는 건가요? 현실적인 걱정은 어떻게 하죠?
A. 바울도 현실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은 실제로 살 소망까지 포기할 만큼 극심했습니다. 중요한 건 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궁극적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통장 잔고나 건강 같은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시선을 유지하는 게 핵심입니다.
Q. 고린도후서 4장은 어떤 상황에서 읽으면 좋을까요?
A. 열심히 살고 있는데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몸이나 환경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특히 와닿는 말씀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크면서 자신이 늙고 있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립니다. 겉사람이 낡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속사람까지 낡아질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가 힘이 됩니다.
Q. 영원한 소망을 붙드는 게 막연하게 느껴질 때는 어떻게 하나요?
A. 저도 그 막연함을 자주 느낍니다. 그럴 때 저는 아이들을 봅니다. 제가 오늘 심어두는 것들이 아이들의 삶에서 열매가 된다는 생각이, 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조금 더 기도하고, 조금 더 신뢰하는 것이 쌓여서 영원으로 이어진다고 믿습니다.
결론
아내 얼굴의 주름을 보고 멈췄던 그 순간, 저는 슬픔 대신 이상한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분명히 낡아지고 있었지만, 그 세월만큼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고,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감각이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게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이 한 문장이 오늘 지쳐 있는 분께 어떤 의미로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말씀이 삶의 방향을 다시 잡아주는 나침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보이지 않는 영원을 쌓아가는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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