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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졌던 그 자리 (고난 7편)
아이가 밤새 열이 내리지 않던 날, 저는 솔직히 기도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해야 한다는 건 알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당시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시편 22편이었고, 첫 줄을 읽는 순간 멈칫 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게 다윗의 말인지 제 말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그 절박함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솔직한 기도 — 다윗이 먼저 울부짖었다
시편 22편은 탄식시(Lament Psalm)의 대표 작품으로 꼽힙니다. 여기서 탄식 시란 고통과 절망을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쏟아내는 형식의 시가 문학을 말하는데, 히브리 시편 150편 중 약 40편 이상이 이 장르에 속한다고 학자들은 분류합니다(출처: Bible Gateway — 시편 장르 분류). 쉽게 말해 성경 안에는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외침이 수십 편에 달한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이구절을 보았을 때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구나' 다소 의아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무조건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달랐습니다.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1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왜 버리셨습니까"라고 정면으로 외쳤습니다. 처음에는 원망이 이라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찾는 절규였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어찌"에 해당하는 표현(라마, למה)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애타는 감정의 극점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성서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저도 아내와 갈등이 깊어졌던 시기, 연로하신 부모님 병원 앞에서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었던 날, 결국 기도 다운 기도를 못하고 "하나님, 저를 왜 이런 상황에 두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잘못된 기도인 줄 알았는데, 시편을 보면 오히려 그게 다윗의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감정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 그것 자체가 믿음의 행위라는 걸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확인하고는 조금은 안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 탄식시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직접 가져가는 장르입니다
- 다윗은 "내 하나님"이라는 소유격을 두 번 반복하며 관계를 놓지 않았습니다
- 믿음은 슬픔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향하는 방향성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 응답 없음이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2절은 제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구절입니다.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밤낮으로 기도했는데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상태, 저도 겪어봤기에 이 한 문장이 얼마나 무거운지 압니다.
신학적으로 이 상태를 "하나님의 침묵(Divine Silence)"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침묵이란 하나님이 실제로 부재하신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체감하는 응답의 공백 기간을 의미합니다. 중세 신비주의 영성가들은 이 시기를 "어두운 밤(Dark Night of the Sou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쉽게 말해 응답이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 오히려 믿음이 깊어지는 연단의 과정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느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잘못된 건가"였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동일한 경험을 했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꽤 중요한 사실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던 다윗조차 이 침묵을 경험했다면, 이 과정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정상적인 과정 안에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제가 묵상하면서 참고가 됐었던 예화가 있어 소개 할까 합니다. 큰 쇼핑몰에서 부모를 잠시 잃어버린 아이가 막 울면서 "엄마가 나를 버렸나 봐"라고 생각하는 동안, 부모는 관리실에 연락하고 여러 층을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사력을 다해 아이를 찾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아이의 생각과 감정은 실제 엄마의 감정과 생각 그 현실적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들더군요.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방식의 일하심 아닐까요.
거룩하심 —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품은 흔들리지 않는다
3절에서 분위기가 급격히 전환됩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1절과 2절의 절규 직후에 나오는 이 문장은, 상황이 달라져서가 아닙니다. 다윗의 형편은 3절에서도 여전히 고난 중입니다. 달라진 것은 그의 시선과 감정입니다.
성경 신학에서 "거룩하심(Holiness)"이란 단순히 도덕적 순결함을 넘어서 하나님이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계신다는 초월성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인간의 감정·상황·이해의 범위 밖에서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완전하시다는 선언입니다. 다윗이 3절에서 이 고백을 꺼낸 것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정교한 전환입니다(출처: The Gospel Coalition — 시편 22편 주석).
성경연구나 자료에서는 저렇게들 말하지만 현실에서 저는 3절을 읽으면서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라고 솔직히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묵상을 거듭할수록 이게 감정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다윗은 감정을 먼저 쏟아낸 다음, 그것과 별개로 하나님의 성품을 붙잡았습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주석서의 구조가 이해가 될 듯 말 듯 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신앙의 성숙도 내지 믿음의 분량을 나타낸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저도 다윗과 같은 신앙의 성숙도가 되길 조심스럽게 바라봅니다.
또한 이 시편은 메시아 예언시(Messianic Psalm)로도 분류됩니다. 메시아 예언 시란 다윗 개인의 경험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중적 구조를 가진 시편을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46)라고 외치셨는데, 이는 시편 22편 1절의 직접 인용입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순간, 그리고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그 순간, 예수님도 이 동일한 절규를 하셨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참 깊은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칠 때, 예수님은 그 자리를 인성의 예수님 또한 이 과정을 지나는 중이셨을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시편 22편이 메시아 예언이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A. 가장 직접적인 근거는 예수님 본인이 십자가 위에서 이 시편 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마태복음 27:46). 이 외에도 22편 후반부에는 손발이 찔리는 묘사, 옷을 나누는 장면 등 십자가 사건과 세부적으로 일치하는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다윗이 이 시를 쓴 기원전 시점에 로마식 십자가형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신학자들이 이 시편을 메시아 예언시로 분류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Q.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시편 22편 2절에서 다윗은 밤낮으로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응답의 부재를 하나님 부재의 증거로 해석하지 않은 것입니다. 응답 없는 기도를 이어가는 것 자체가 믿음의 근육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기도의 형식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그 기도는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Q. 하나님께 "왜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쳐도 되나요?
A. 시편 22편이 정확히 그 허락의 근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총애하시는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된 인물인데, 그가 이 절규를 기도로 올렸고 그것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정을 숨기고 억지로 찬양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울부짖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외침을 십자가 위에서 하셨습니다.
Q. 탄식시와 일반 찬양시는 어떻게 다른가요?
A. 찬양시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형식이라면, 탄식시는 현실의 고통을 가감 없이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형식입니다. 탄식시는 대개 고통 호소 → 하나님께 간청 → 신뢰 고백이라는 세 단계 구조를 따릅니다. 시편 22편의 1~3절도 이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절망(1~2절)에서 하나님의 성품 고백(3절)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그것입니다.
결론
지금도 힘들 때면 저는 이 쇼핑몰 예화를 떠올립니다. 아이는 버려졌다고 느꼈지만 부모는 아이를 찾아 미친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는 그 장면이, 제가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해석하는 어떤 기준이 되었습니다. 시편 22편 1~3절은 짧은 세 구절이지만 그 안에 다윗의 절규와 신뢰,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고백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쩌면 부모를 잃어버렸다고 울부짖는 아이가 아닐는지요
제가 이 말씀을 통해 묵상을 해봅니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감정이 다 쏟아진 자리에서도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는 고백과 감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신다는 그 사실이, 가장 막막한 순간에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됩니다. 한 번쯤 시편 22편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절망에서 찬양으로 이어지는 그 흐름 전체가,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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