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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묵상 그리고 삶

용서 할수있을까: 마태복음 18장 21-22절(유대 전통, 끝없는 용서, 삶의 적용)

마하나임220 2026. 8. 19. 18:01

목차


    일으켜 세움 (용서 1편)

    누군가의 얼굴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용서하려 애썼지만, 솔직히 말하면 용서보다는 그냥 참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은 바로 그 지점,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예수님이 건네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과 유대 전통의 배경

    마태복음 18장을 읽을 때마다 베드로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공동체 안에서 죄지은 형제를 어떻게 권면할지 가르치시자마자, 베드로는 손을 들고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이 질문이 얼마나 대담한 것이었는지는 당시 유대 랍비 전통을 알면 더 잘 보입니다. 탈무드적 전통(Talmudic tradition)에서는 같은 죄에 대해 세 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탈무드적 전통이란, 유대교 율법 해석과 생활 규범을 집대성한 구전 전통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그 기준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일곱 번을 제시했으니, 나름으로는 꽤 파격적인 제안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마태복음 18:22). 490번이라는 숫자를 계산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횟수를 셈하는 방식 자체를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구절을 제대로 읽었을 때, 성경말씀이니깐 당연히 용서하시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씀 하시겠지라고 원래 성경은 사람으로서는 하니힘든 경지의 것을 요구하는 거잖아 라고 생각했습니다. 


    • 유대 랍비 전통의 용서 기준: 동일한 죄에 대해 최대 3회
    • 베드로의 제안: 7회 (당시 기준으로 매우 관대한 수치)
    • 예수님의 대답: 일흔 번씩 일곱 번 — 횟수를 세지 말라는 의미
    • 3단계 권징의 목적: 징계 자체가 아닌 회개와 회복
    요약: 베드로의 질문은 당시 유대 전통을 훌쩍 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용서를 숫자로 계산하는 방식 자체를 내려놓으라고 가르치셨다.

     

    끝없는 용서 — 탕감받은 자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말씀하신 직후, 바로 비유 하나를 들어주십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이야기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 노동자가 평생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사실상 불가능한 액수입니다. 그 종이 왕 앞에 엎드려 사정하자 왕은 놀랍게도 그 빚 전부를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곧장 나가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그러니까 대략 석 달치 임금쯤 되는 소액을 빌린 동료를 붙잡고 목을 조릅니다. 이 장면이 너무 황당하게 느껴지시겠지만, 제가 직접 이 말씀을 적용해보려 했을 때 깨달은 건, 저도 이 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수없이 용서받으면서도 누군가의 사소한 잘못 하나를 수년째 붙잡고 있었으니까요.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는 신학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통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대속이란, 예수님이 우리가 져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치르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칭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형제의 잘못 앞에서 서는 자리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자의 자리가 아니라, 함께 용서받은 자의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용서가 곧 신뢰의 회복이나 관계의 원상복구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반복적인 폭력이나 심각한 학대가 있는 상황에서는 안전을 확보하고 법적·전문적 도움을 먼저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마음속 복수심과 원망을 하나님께 맡기는 내면의 결단이지, 위험한 상황을 무조건 감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본문을 해석할 때 언약 공동체(Covenant Community)의 맥락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언약 공동체란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 안에 함께 속한 신앙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같은 탕감의 은혜를 받은 공동체 안에서,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출처: Bible Gateway, 마태복음 18:21-35).

    요약: 끝없는 용서의 근거는 상대의 자격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받은 하나님의 무한한 탕감의 은혜다.

     

    용서를 삶에 적용하는 일 — 결단과 현실 사이에서

    어떤 목사님이 어린 시절 자신을 몹시 괴롭혔던 친구를 수십 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수십 년간 미움 속에 묶여 있었던 사람은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친구를 용서하기로 결단했을 때, 상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마음에서 오래된 무게가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경험이 없으신가요

    제 경우에도 비슷했습니다. 부단히 말씀을 붙들고 용서하려 했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건 용서보다 회피에 가까웠습니다. 그 사람이 보이면 자리를 피하고, 하나님께 맡긴다고 되뇌지만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응어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단번에 완성되는 감정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결단을 갱신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모습조차 담아가고 계십니다. 

    성령의 열매(Fruit of the Spirit) 중에 오래 참음과 자비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성령님이 신자의 삶 안에서 맺으시는 성품의 변화를 말합니다(갈라디아서 5:22-23). 용서도 이와 같습니다. 의지로 시작하지만, 그 의지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조금씩 실제 변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결단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같은 결단을 반복해야 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게 어쩌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의미하는 바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 상담학자들도 용서를 사건이 아닌 과정(process)으로 봅니다. 엔라이트(Robert Enright) 박사의 용서 모델에 따르면, 용서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해소가 아니라 의식적인 결단에서 출발하며, 이 과정이 오히려 용서하는 당사자의 심리적 치유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출처: International Forgiveness Institute). 용서가 상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요약: 용서는 감정이 해결된 뒤 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결단과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용서하면 관계를 예전처럼 회복해야 하나요?

    A.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마음속 복수심과 원망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내면의 결단입니다. 관계의 회복은 별개의 문제이며, 특히 반복적인 폭력이나 학대 상황에서는 안전을 먼저 확보하고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용서했다고 해서 해로운 관계로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Q. 일흔 번씩 일곱 번이 정말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인가요?

    A. 아닙니다. 예수님이 490이라는 숫자를 제시하신 것은 "그 횟수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용서를 횟수로 계산하는 방식 자체를 내려놓으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유대 랍비 전통이 세 번을 원칙으로 삼았고 베드로는 일곱 번을 제안했는데, 예수님은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Q. 용서하려 해도 감정이 따라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저도 그 경험을 오래 했습니다. 기독교 상담학에서는 용서를 감정이 정리된 뒤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 결단에서 시작하는 과정으로 봅니다. 감정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하나님, 저는 이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단합니다"라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Q. 마태복음 18장의 권징 절차는 지금도 교회에서 적용되나요?

    A. 원칙적으로는 적용됩니다. 개인 권면 → 증인과 함께 권면 → 공동체 판단이라는 3단계 구조는 여전히 교회 치리(church discipline)의 기본 원리로 사용됩니다. 다만 이 절차의 목적이 징계 자체가 아니라 회개와 회복에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차보다 마음이 앞서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론

    용서는 참 어렵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애써봐서 압니다. 말씀을 읽고, 결단하고, 또 흔들리고, 다시 결단하는 일을 반복해왔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용서의 출발점은 상대가 받을 자격이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를 먼저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가를 기억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18장 앞에 서서, 아직 마음속에 붙잡고 있는 이름이 떠오른다면 그 이름을 하나님께 조용히 내어드리는 것부터 시작해보시길 권합니다. 단번에 감정이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성령님이 그 걸음을 함께 걸어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