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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묵상 그리고 삶

비판하지말라 : 누가복음 6:37 (비판, 정죄, 용서)

마하나임220 2026. 8. 20. 02:37

목차


    일으켜 세움 (용서 2편)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는 세 마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태도를 압축하셨습니다. 처음 이 말씀을 보게되면 "이게 정말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마다 입에서 먼저 나오는 것은 판단이었고, 마음 깊은 곳에 쌓이는 것은 정죄였으니까요.



    비판과 정죄 — 우리는 왜 쉽게 판단하는가

    누가복음 6장 37절은 예수님의 평지설교(Luke 6:20–49) 한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평지설교란 예수님이 산 위가 아닌 평지에서 제자들과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가르치신 일련의 교훈을 가리킵니다. 산상수훈과 유사하지만, 청중의 범위와 구체적인 적용 면에서 조금 다른 맥락을 가집니다.

    이 말씀이 선포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율법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Pharisee), 즉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지키던 종교 지도자 집단이 그 율법을 타인을 재단하는 도구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구별된 자"를 뜻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구별됨이 종종 다른 사람을 향한 우월감과 정죄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비판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동사는 '크리네테(κρίνετε)'입니다. 여기서 크리네테란 단순한 한 번의 판단이 아니라,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쓰여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비판 성향 자체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를 보면 자동으로 잘못을 찾아내어 판결을 내리려는 태도를 끊으라는 명령입니다.

    "정죄하지 말라"는 그보다 한 단계 더 강합니다. 정죄(condemnation)란 상대에게 "저 사람은 끝났어, 회복 불가능해"라고 최종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법정 용어로 치면 유죄 선고에 해당합니다. 제가 경험상 이건 좀 다르다고 느끼는 지점인데, 우리는 종종 비판과 정죄를 구분하지 않고 섞어 씁니다. "저 사람 왜 저래?"가 비판이라면,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야"는 이미 정죄에 가깝습니다.

    성경은 분별(discernment)을 금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7:24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출처: Bible Gateway).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를 가려내는 판단력은 신앙인에게 필요한 능력입니다. 문제는 그 분별이 아니라, 편견과 우월감에서 나오는 습관적 정죄입니다.

    • 비판(κρίνετε, 크리네테): 습관적으로 타인의 잘못을 찾아내어 판단하는 태도
    • 정죄(condemnation): 상대에게 최종 판결을 내려 회복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행위
    • 분별(discernment):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판단력 
    • 최종 심판의 권한: 오직 하나님께 속한 고유 권한 (로마서 14:10, 고린도전서 4:3~4)
    요약: 비판과 정죄는 다르며, 성경은 분별을 금하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타인을 단죄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심판 권한을 침범하는 행위임을 경계합니다.

     

    용서 — 상처가 남아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예수님은 비판과 정죄를 멈추라고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라"는 적극적 명령이 그 뒤에 붙습니다. 그냥 미워하지 않는 것과 적극적으로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forgiveness)란, 신학적으로 상대의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용서란 복수심과 원한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상처가 자신의 삶을 계속 지배하지 못하도록 내려놓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이 점이 종종 오해를 낳습니다. "용서하면 그냥 당하고 살라는 뜻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상대방보다 저를 더 오래 괴롭혔습니다.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한동안 그 사람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혼자 대화를 반복했습니다. 그게 저를 갉아먹고 있었던 겁니다. 제 경험상 이건 용서가 상대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저 자신을 미움의 사슬에서 풀어주는 행위라는 걸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번 구겨진 종이는 다시 펴도 자국이 남습니다. 말과 행동도 그렇습니다. 용서는 그 자국을 지우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국이 관계 전체를 얽어 매게하지 않도록 울타리를 세우는 일입니다. 용서를 '회복'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경계 설정'에 더 가까운 개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구겨진 종이는 그 나름 한 켠에 잘 보관하면 될 것입니다. 

    물론 "용서하면 무조건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시각을 가진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부분에서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로마서 12장 18~19절을 보면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나옵니다(출처: Bible Gateway). 이 말씀은 복수심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지, 건강한 경계(boundary)까지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경계란 상대의 반복적인 잘못이나 부당한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적·관계적 한계선을 의미합니다. 필요하다면 거리를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울타리에 해당합니다.

    요약: 용서는 잘못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원한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을 미움의 사슬에서 풀어주는 능동적 결단이며, 건강한 경계 설정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비판하지 말라는 게 뭐가 잘못됐는지 지적하면 안 된다는 뜻인가요?

    A.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별(discernment), 즉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능력을 오히려 권장합니다. 요한복음 7:24에서도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금하는 것은 편견과 우월감에서 비롯된 습관적 비판, 즉 상대의 동기와 마음까지 단정 짓는 태도입니다. 건설적 피드백과 정죄는 다릅니다.

     

    Q. 용서하면 관계를 무조건 회복해야 하나요?

    A. 이건 "그렇다"는 시각도 있고 "아니다"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용서는 원한과 복수심을 내려놓는 내면의 결단이고, 관계 회복은 그와 별개의 과정입니다. 상대의 반복적인 잘못에 건강한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정죄가 아닙니다. 용서와 경계는 동시에 가능합니다.

     

    Q. 바리새인이 왜 자꾸 부정적인 예로 나오나요?

    A. 바리새인은 율법을 누구보다 열심히 지킨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열심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타인을 정죄하는 방향으로 흘렀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 준수 자체를 비판하신 게 아니라, 그 동기와 태도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신앙의 형식은 있지만 자비가 없는 상태를 경계한 것입니다.

     

    Q. 누가복음 6:37 말씀이 평지설교 어디쯤 위치하나요?

    A. 누가복음 6장 20절부터 49절까지가 평지설교 전체입니다. 37절은 그 중반부에 해당하며, 원수 사랑(6:27)과 자비(6:36)에 대한 가르침 바로 뒤에 이어집니다. 흐름상 "왜 용서해야 하는가"의 근거가 앞에 놓이고, 37절에서 구체적인 실천 명령이 나오는 구조입니다.

     

    결론

    누가복음 6:37은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세 명령은 하나님께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 그 자비를 흘려보내야 한다는 복음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 앞에서 제일 먼저 돌아보게 되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제 자신의 습관적 판단 성향입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용서가 곧 모든 것을 참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필요한 경우 건강한 경계를 세우고, 공동체 안에서 정의를 구하는 것은 신앙인의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상대를 향한 증오와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 —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정죄하고 있다면, 그 마음을 이 말씀 앞에 내려놓아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