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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는 삶 (평안)
이력서를 넣고 연락을 기다리던 그 시간, 저는 분명 "평안을 주신다"는 말씀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합격 통보가 오기 전까지는 그 평안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4:27이 말하는 평안은 과연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그 안도감과 같은 것일까요?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의 평안과 예수님의 평안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오랫동안 수학강사로 일하다가 그 자리를 내려놓았을 때, 저는 처음으로 "평안"이라는 단어를 진지하게 들여다봤습니다. 이력서를 여러 곳에 넣고 연락을 기다리던 몇 주 동안, 기도도 했고 말씀도 읽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계산이 돌아갔습니다. 이번 달 생활비는 어떻게 되는지, 이 나이에 새로운 곳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평안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합격 통보가 온 다음에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로 저는 한 가지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경험해 온 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상황이 유리하게 정리되었을 때 찾아오는 조건부 안도감을 말합니다. 돈이 충분하면 마음이 놓이고, 건강 검진 결과가 좋으면 안심이 되고, 취업이 되면 비로소 편해지는 그 감각.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집니다.
반면 요한복음 14:27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안은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 앞에는 스승의 죽음과 자신들을 향한 박해라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앞으로 아무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조건을 바꿔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조건이 그대로인 상태에서도 누릴 수 있는 무언가를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평안은 샬롬이라고 말을 합니다. 샬롬이란 단순히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상태에서 오는 전인적인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해, 즉 구속의 완성에서 흘러나옵니다. 쉽게 말해, 십자가를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어떤 외부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기초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 세상의 평안: 상황이 호전될 때 찾아오는 조건부 안도감. 상황이 바뀌면 함께 사라진다.
- 예수님의 평안: 상황과 무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평정. 외부 조건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
성령의 평안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가
이 질문이 저를 오랫동안 붙잡았습니다. 교회 예배당 안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집니다. 말씀을 펴면 뭔가 가라앉는 느낌이고 거룩해 집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고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그냥 세상에서 삶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한동안 이 두 가지를 혼동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느끼는 그 고요함이 곧 성령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27을 보면, 예수님은 평안을 말씀하시기 직전에 성령 보혜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란 '곁에서 돕는 자'라는 뜻으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 전체를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실제로 믿고 깨달을 때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출처: 한글넷 고흐마 성경강해).
저는 아직 그 경지에는 근처도 못갔습니다. 신앙 연수가 쌓이면 자연스럽게 되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매 순간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훈련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상황을 바라보다가 주님을 바라보는 방향 전환, 그게 반복될 때 조금씩 그 평안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길 바랄 뿐입니다.
빌립보서 4:7은 이 평안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표현합니다(출처: YouVersion 성경). 여기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여기가 인간의 이성과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평안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취업 통보를 받고 나서야 편안해진 것은 제 이성이 '이 정도면 괜찮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각 안에서 작동하는 평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지각을 초월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변한 것은 없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지는 그 상태. 제 경험 속에서 그런 순간이 전혀 없었다고는 못하겠지만, 아직은 거의 드문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금도 부단히 그쪽으로 걸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방향이 맞다는 것은 신앙의 세월이 쌓이는 만큼 명확해 지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요한복음 14:27의 평안은 단순한 작별 인사 아닌가요?
A. 그렇게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 말씀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선물로 준다'고 명확히 하셨고, 그것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직접 대조하셨습니다. 또한 이 평안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신자들에게 실현되는 영원한 약속으로, 고별 인사와는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Q. 믿음이 있어도 힘든 상황에서 평안이 안 느껴지는 건 신앙이 약한 건가요?
A. 제 경우에도 그렇지 않았냐고 솔직히 자문해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령의 평안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시선을 의식적으로 돌리는 반복된 훈련 속에서 조금씩 깊어집니다. 힘든 가운데 평안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여전히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Q. 예배나 말씀 묵상 때 느끼는 고요함도 성령의 평안인가요?
A. 그 고요함이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제 경험상 두 가지를 동일시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예배당 안의 고요함은 환경이 주는 안도감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성령의 평안은 그 환경이 사라진 뒤, 현실의 문제 한복판에서도 유지되는 것이 핵심입니다.
결론
정리하면, 저는 오랫동안 결과가 나온 뒤에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말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아직 세상이 주는 평안 안에서의 반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27이 말하는 평안은,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도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 하나로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변한 건 없지만 흔들리지 않는 그 무게중심. 저는 그것을 향해 아직 걸어가는 중입니다.
앞으로도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갈등, 불확실한 미래는 계속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제 계산을 먼저 돌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더 빨리 시선을 주님께로 돌리는 연습을 해보려 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방향만 맞으면 된다는 것, 그것도 이 말씀이 주는 위로 중 하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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